안토니 기든스는 현대사회에서 일상이 공허하고 진부한 것은 두 가지 요인이라고 했다. 하나는 자본주의 산물인 지어진 환경, 요컨대 특정 형태로 상품화한 도시공간에 있다고 했다. 또 하나는 공동체의 변화를 들었는데, 이 또한 도시공간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도시는 시골보다 훨씬 밀접한 환경에 살면서도 상호 격리와 단절된 일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도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파트는 날이 갈수록 초고층화하고, 시가지는 사람보다 자동차가 주인 행세한 지 오래다. 도시풍경은 화려한 쇼윈도, 현란한 간판 등 건물 파사드(Facade)의 끊임없는 변신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도시는 늘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익명성이 보장된 타인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저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이거나 서로가 구경의 대상일 뿐, 세대가 공감하는 공동체문화는 자리 잡을 틈새가 없어 보인다. 디지털, 인공지능, 외국문물 등이 뒤범벅이 된 도시풍경은 새로운 유행을 받아들이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공동체문화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를 개선해보겠다고 혁신과 소통을 주장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부르짖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람과 자연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을 바꾸겠다며 시작한 도시재생사업은 단지 건물외장 모양새를 바꾸는 데 치중하고 있다. 문화도시를 만들겠다며 여기저기 조형물(Polly)을 설치하고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며 눈속임을 하고 있어 근본적인 도시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어디 그뿐인가, 인구감소, 경제성장 등 정량적 수치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면서도 사람들의 고민과 공동체의 행복, 불안한 미래사회 등에 대해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과연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전혀 없을까?
식물 이름보다, 제대로 보는 법 중요
장자크 루소는 그의 저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의 서문에서 ‘나는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뒤떨어진 것이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단 한 줄의 글 ‘너 자신을 알라’에 인간성 탐구자들이 쓴 어떤 두꺼운 책들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교훈이 담겨 있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변화된 상황이나 인간의 진보를 자연 상태의 본질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확실히 관찰하기 위해 미리 어떤 식으로든 대비해야 하는 사람은 더욱 철학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의 지적대로 지금은 철학 부재의 시대인지 모르겠다. 그의 기본적인 믿음은 ‘자연은 선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유익하다거나 아름답다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인류가 원래 정직하고 선하긴 하지만 이성과 문명발달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만 그렇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목가적인 삶이 끝나게 된 이유로 그는 사회적 친교와 사상을 지목했다. 사회는 공동체 안에서 자연적 불평등(지능, 체력, 미모)이 정치적 불평등(계층, 지위)을 부추겨 마침내 기만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루소는 중요한 문제로 당대 인간들이 이런 불평등을 만회하기 위해 자연을 거슬러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존재하는 것과 보이는 것이 별개’가 됐다고 탄식했다. 요컨대 철학, 인간미, 예의범절, 고상한 격언 등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른 사람에게는 물으면서도 똑같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는 던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덕성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 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을 의식하며 행복해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식물학’이었다. 그는 실제 숲으로 들어가 지내면서 식물을 신중히 관찰하였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붙이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치자고 제안했다. 식물을 보며 우둔하고 단조로운 감탄이 아니라 정신을 온전히 자연에 집중하자고 한 것이다.
우리가 신세 지고 있는 자연을 지켜야
루소는 식물학적인 통찰을 통해 결국 자신을 치유하였고, 궁극적으로 문명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그저 원론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치부해버릴 문제가 아니라 자연(自然), 혹은 본질(本質)로 돌아가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겠다.
생텍쥐페리는 ‘사랑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마주 본다는 것은 서로 보고 있는 대상이 다르고 그로 인해 같은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목표로 하는 것은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이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계속 유지하자는 것이다. 함께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당연히 사람과 자연이 되어야 한다. 마천루처럼 높은 빌딩, 위세 등등한 권력, 부러워할 만한 명예 따위도 우리의 현실을 회복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모두 이뤘다고 꼭 행복해진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신세지고 있는 자연을 어떻게 지키고 우리가 사는 도시를 어떻게 가꾸어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과 자연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송태갑 / 광주전남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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