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어느 곳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류역사,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도시역사는 살고 싶은 풍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살고 싶은 곳을 정할 때 풍수(風水)를 따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마을이나 도시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인류창조의 역사가 기록된 구약성서를 보면 거기에 에덴동산이 등장한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삶터라고 할 수 있는 에덴(Eden)에 대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람은 풍경의 영향 받으며 살 수밖에
에덴동산은 온도가 적절하여 사계절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동산 중앙에 강이 흐르고, 온갖 식물이 풍성해 먹을 것도 충분했다. 게다가 창조주 스스로도 흡족해할 만큼 풍경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으로 인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어버림으로써 신뢰를 저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그곳에서 추방당해야만 했다.
그 후 인류는 고향을 그리워하듯 향수병을 앓으면서 줄곧 그곳을 동경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일종의 유토피아 사상과 맞물리면서 우리가 찾는 삶터의 모델이자 이상향이 되었다. 좋은 삶터란 기본적으로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역사 가운데 특히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과도한 먹거리 확보를 위해 얼마나 많은 풍경을 희생시켰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뿐 아니라 과다한 쓰레기, 공해와 오염, 기후 온난화, 공동체 붕괴 등 다양한 환경과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1608∼1674)은 대서사시 실락원(失樂園)과 복락원(復樂園)에서 구약성서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타락과 추방, 그리고 속죄에 대한 종교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이 이야기는 종교적 측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최소한 우리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나 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영국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1770∼1850)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풍경 속을 걸어보라’고 권유했다. 시인이나 예술가 등 창조적 영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풍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풍경에 따라 어떤 감정이 반응하는지 섬세하게 느끼지 못할 따름이다.
19세기 초중반 미국의 광활한 풍경을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낭만주의 풍경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토마스 콜(1801∼1848)이 그의 저서 ‘미국 풍경론(1835)’에서 했던 말은 되새겨볼만하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한 번도 벗어난 것 같지 않은 풍경은 창조주를 연상시킨다. 이런 풍경은 더럽혀지지 않은 작품이며 정신은 그곳을 보면서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풍경은 자자손손 살아야 할 삶의 터전
더럽혀지지 않은 풍경을 흔히 원풍경(原風景)이라고 말한다. 이 용어가 보편화된 것은 아니다. 국가나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본의 권위 있는 사전인 코우지엔에는 ‘원풍경을 심상풍경(心象風景) 가운데서 원체험을 상기시키는 이미지’로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 외에도 ‘원체험으로 생기는 여러 이미지 중 풍경의 모양을 갖고 있는 것’ 혹은 ‘변화 이전의 그리운 풍경’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사람마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풍경은 제각각일 수 있지만, 절대 다수가 인정하는 원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며 공유하고 있는 원풍경은 공공의 자산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도시와 도로건설 등 개발행위로 자연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풍경을 살풍경(殺風景)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일은 풍경을 죽이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경작지나 갯벌 등은 약간의 변화가 불가피하지만, 지속적으로 풍경이 복원된다는 점에서 원풍경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우리 마을풍경도 원풍경에 가깝다.
원풍경과 살풍경의 차이는 변화정도와 지속성 여부에 달려 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 다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은 원풍경이 잘 보전되어 있는 경우이다. 반면 너무나 많이 변하여 도저히 어린 시절의 감흥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원풍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복한 삶, 지역 활성화, 건전한 공동체, 지속가능한 개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데 있어서 풍경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풍경은 당대에 사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 그 풍경 속에서 먹고 보고 치유받고 영감을 받으며 살아야 할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우리와 우리 후세대의 미래가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가 될지는 풍경의 가치에 대한 인식여부와 더불어 그에 걸맞은 삶의 태도에 달려 있다.
송태갑 / 광주전남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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