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유치환 시 ‘깃발’ 1936년)
애수(哀愁)는 슬픔이다. 인간정서의 가장 순수한 순정(純情)이다. 시인은 참 아름다운 푯대를 세웠다. 여린 듯 강한 마음이 슬픔이다.
푯대 세움은 입지(立志) 즉 뜻을 세움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순수한 뜻을 푯대 세우며 인간은 진보로 나아간다. 청마 시인 말고, 히틀러나 이등박문처럼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미국은 제 나라의 원리를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 한다. 허나 1776년 토마스 페인이 ‘상식’(Common Sense)이란 책을 내기 전까지 미국의 운명은 명백하지 않았다.
‘미국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도, ‘최초의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페인이 그 책에서 주장한 ‘미국독립의 정당성(상식)’을 반대했다. 현실성 가능성도 없다고들 했단다. 생각조차 못했던 일, 미국독립은 페인에 세운 그 푯대에서 시작됐다.
인간의 달 착륙,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건 저 푯대를 ‘정치적 잠꼬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허나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디뎠다.
뜬금없는 흰소리인가? ‘남도밥상’ ‘전라도음식’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겨레의 큰 재산이 인류사에 제대로 서야 한다는 의논, 한창기 선생(1936~1997)과 나눈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으로 (국제적으로도) 성공한 서울법대 출신이 판소리, 차(茶 녹차)와 그릇 등 70년대의 후미진 고샅에서 그림자로 어슬렁거리던 한국의 보물들을 들어 올리며 품었던 속셈 중 하나였다. 그 백과사전은 서양문명의 금자탑 중 하나다.
게미진 남도밥상이 인류의 문명에 기여하도록 ‘한국의 문화’가 나서야 한다는,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생각, 마치 천기(天機·하늘의 비밀)와도 같았다. 그와 식사하며 나눈 얘기, 여러 해 여러 세상 돌고 돌아 겨우 그 뜻 실마리를 짐작한다.
그는 호연(浩然)한 지구인(地球人)이었다. 남도밥상이 기왕에 유명한 프랑스 터키 중국의 음식과 함께 대전환기의 인류를 위무(慰撫)할 역량과 책무를 가졌다는 그의 뜻을 읽는다. 큰 생각, 한창기를 다시 보자. 과거를 장엄(莊嚴)하는 것은 장엄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니.
남도의 마음을 통찰한 한창기에게, 또 우리에게 이 남도밥상은 마치 명백한 운명과도 같은 제목이다. 우리는 남도밥상을 현대사 한국의 순정의 푯대로 세운다.
유홍준 선생이 1993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강진의 남도밥상을 길게 얘기한 것을 두고 독서인들은, 여태 ‘문화로서의 음식’을 얘기한다. 그 인식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미 국내외에 입맛으로 오래 스민 동아지중해 전통의 그 입맛(旨 지)을 새삼스럽게 다셔본다. 입지(立旨)로 입지(立志)하는 뜻이다. 음식은, 그것을 먹는 사람과 겨레의 본질이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하릴없이 삐져나온 문화가 번져나는 모습을 그린다.
‘허황되다’ 했던 미국독립이나 달 착륙의 꿈을 톺아보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와 의미, 축적된 지식(수준)으로 볼 때 저 거대한 두 푯대보다 ‘남도음식’의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청년들아, 작은 동그라미 속 어중간(於中間)을 깨라. 지금 성벽 너머 새 세상의 바다로 몸을 던져라, 한창기처럼, 새 문화 짓자.
강상헌 / 미래서원 원장·언론인
토막새김
최근 한가위 특집 ‘한식연대기’(KBS) 등 한국음식을 국제적으로 조명했다는 방송사들의 시리즈들을 다 보았다. 우리 음식에 스민 남도밥상의 가치나 실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심하게 희석(稀釋)돼 스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무성한 ‘음식산업’ 얘기 속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음식의 바탕에 스몄다.’거나 ‘전라도음식이 입맛 잡는 게미가 있지.’라는 투의 (당연한) 얘기를 눈에 보이는 실체로, 체계적 이론으로, 감성적 콘텐츠로 만들어내지 못한 결과일 터. 우리끼리 마주보고 손바닥 부딪히며 자기 자랑만 해온 것인가.
사회 핵심인 젊은 층이 모르면, 남도밥상은 없는 것이다. 한국의 중요한 (생활)문화, 외국이 모르면 그 가치를 더 주장할 수 없다. BTS 오겜 뜨니 저절로 함께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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