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언론이 (내 얘기를) 논의의 이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모여 달라’고 부탁하는 절차다. 이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자처한다’는 기괴한 표현의 기사가 늘 나온다.
스스로(自) 청(請)한다, 즉 내가 부탁한다는 ‘자청한다’의 오류(誤謬)다. 이응(ㅇ) 받침 하나, 철자(綴字)로 기껏 반 끗 차(差)이니 대충 그냥 쓰(자)는 것일까? 요즘 부쩍 심해진다.
더 심각한 건, 요즘 인간세상의 최대 관심사로 인간(人間) 즉 사람들 사이(間)에 은근하게 공포로 다가서고 있는 것 같은 인공지능(AI)마저도 이를 헷갈려하고 있는 점이다.
말과 글 즉 언어를 표시하는 문자(글자)에는, 점 하나 선 한 줄 일점일획(一點一劃)이 대충 그냥 된 것은 없다. ‘자청’과 ‘자처’도, 이를 한자로 쓴 自請과 自處도 마찬가지다.
미국 얘기, 볼티모어 카운티 한 고교에서 먹다가 말아 쥔 감자칩 비닐봉지와 손가락을 총으로 오인한 인공지능(AI) 감지기가 경찰차 8대를 출동시켰다. 손가락의 주인공 타키 앨런 군을 체포하려 했던 10월 22일의 ‘사건’이다.
우스개 같지만 지역의 한 언론이 대충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정색(正色)하고 보도했다. 이내 세계적인 관심사가 됐다. AI의 정체(正體)나 작동원리를 짐작하게 하는 얘기다.
우리나라 AI도 이에 못지않게 황당한 상황을 (10월말 현재) 빚고 있다. 네이버 검색에서 뉴스를 설명해 준다는 ‘AI 브리핑’을 살펴보자.
<기자회견을 ‘자처’ 또는 ‘자청’한다는 것은 특정 단체나 개인이 스스로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요청하거나 주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정치, 사회,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자회견을 자처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자회견 자처의 사례들’이 이어진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이 ‘백골단’이라는 청년조직의 국회 기자회견을 주선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조직의 명칭이 과거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켜 비판을 받았습니다. …>
네이버의 이 ‘브리핑’(2025년 1월)에 따르면 ‘자처’와 ‘자청’은 같은 뜻이다. 언론이 ‘네이버 AI’를 저리 가르쳤을까? 아마 그랬으리라. 이제는 저 ‘가르침’이 되레 언론(인)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저리 가르치고 있다. 명백한 오류의 이런 순환(循環)에는 브레이크도 없다.
함께 실린 사례(事例) 중 하나인 ‘민주언론시민연합’의 공동기자회견문(2023년 9월)은 김민전 관련 ‘백골단’의 ‘기자회견 자처’와 대조적이다.
<정권의 충견(忠犬)을 자처한 검찰은 언론 탄압을 당장 멈춰라. …> (한자는 필자가 삽입)
후자(後者) 즉 민언련의 ‘자처’가 자처(自處)의 옳은 활용이다. 전자(前者) 즉 김민전 관련 ‘백골단’ 글 제목의 ‘자처’는 자청(自請)을 자처로 잘못 알고 쓴, 틀린 활용 사례다.
어쩌다 우리 말과 글이 저런 무지와 난용(亂用)에 들게 됐을까? 한자를 비교적 아는 60대 이상의 선배세대는 이 상황을 짐작하기도 어렵겠다. ‘안중근 의사(義士)’로 표기되는 안중근 장군이 ‘내과 치과 같은, 병원의 무슨 과 의사였냐’고 묻는다는 얘기는 결코 농담일 수 없다.
이 사례뿐일까? AI를 잘못 가르치는(?) 공공언어의 이런 오염은 우리 ‘생각의 세계’를 안개 속 헤매듯 애매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스티브 잡스의 윈도’ 잠시 닫고, 세상 사물(事物)의 본디를, 또 진짜 ‘나’를 만나야 할 때다.
강상헌 / 슬기나무언어원장·언론인
토막새김
자처하지 말라. ‘자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 즉 자살(自殺)이란 뜻이기도 하다. 의외인가? 처형(處刑)이 ‘사형의 처결(處決 집행)’임을 알 것.
處자는 시간 장소 자격 등을 뜻하는 추상적인 단어다. 호랑이 虎(호)의 일부인 虍(호)와, 탁자에 기댄 사람 모습 処(처)의 합체이니 ‘호랑이 곁의 사람’ 그림이 좀 으스스하지 않은가.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겨 그렇게 처신함’이란 묘한 뜻도 있다. 거기서 비롯된 듯한 ‘기자회견을 자처한다’는 말은 ‘내가 기자회견이다’라는 엉뚱한 뜻이다. 말과 글을 속뜻(한자의 그림 같은)과 함께 생각하면, 나와 우리도, AI도 함께 망신(亡身)하진 않으리.
(58564)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 1 전남새뜸편집실 TEL : 061-286-2072 FAX :061-286-4722 copyright(c) jeollanamdo,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