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물 없는 도시는 기괴하다. 원래 이 땅에 ‘물’이 없었더냐. 모여 사는 인구(人口) 늘면서 시기 놓치지 않고 농사지을 둠벙도 파고 방죽도 크게 돋우어 민초(民草) 삶 보듬는 마련에 낙낙했지 않았더냐. 향토사학 거목 김정호 선생의 증언이다.
무등산을 병풍친 그 옥색(玉色) 물빛이 그립다. 어진 임금 세종대왕의 마음이 힘써 파고 뚝(둑) 돋웠던(1440~1443년) 아름다운 그 호수 경양방죽을 우리는 아프게 추억한다.
교통 요충지였던 경양(景陽) 역참(驛站) 곁 짱짱한 ‘호수공원’이었다. 수면(水面) 4만6000여 평에 총면적 6만5000여 평, 깊은 곳 수심 10여 미터, 버들 숲 제방 길이가 10여 리였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저서 ‘목민심서’에서 공골지(경북 상주) 의림지(충북 제천) 합덕지(충남 덕산) 남대지(황해도 연백) 등과 함께 이 경양방죽을 전국에서 큰 방죽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 언론 출신 한 국회의원이 ‘광주는 물길을 살려야 크게 살아나는 도시’라며 주장해 오던 핵심 주제 중의 하나였다.
굴곡진 현대사가 제 자리 잡으며 이제 ‘전라(남)도 광주’를 회복하니 이 경양방죽은 여러 의의와 함께 이 고장 살려낼 ‘광주 물(길)의 복원(復元)’ 차원으로 서둘러야 하리라.
1940년경 일제(日帝)가 이 방죽을 처음 뭉갰다. 식민(植民) 지배에 필요한 왜인(倭人)들의 주거지로 또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소록도와 나병(癩病)을 떠올리게 하는 ‘양림동의 성자’ 최흥종 선생 등 지역 인사들이 일제에 거세게 항거해 수면의 3분의 1인 1만9000여 평은 살려냈다. 그렇게 큰 상처 입은 채로 경양방죽은 여름이면 뱃놀이에, 겨울엔 얼음지치기로 시민들의 낯낯한 놀이터였다.
그러다 박정희 쿠데타 군사정권이 금남로 개설 등의 자금 마련 명목으로 1960년대 말 그 방죽마저 메웠다. 그 자리 계림동 중흥동 일대에 주택과 시청이 들어섰다. 5·18 이후 시청은 상무지구로 옮겨갔다. 그렇게 광주는 그 ‘기괴한 도시’의 본보기 같은 ‘물 없는 곳’이 됐다.
세종대왕이 농업을 잘 키우자는 중농(重農)정책의 밝은 눈으로 애써 판 방죽을 왜(倭)의 도적이 한번, ‘박정희 정권’이 다시 한번, 남은 흔적마저 파묻은 것이다. 남도의 낙낙한 마음까지도 묻혀버렸을까? ‘물 부족’ 영향은 가뭄 때 상수도 등의 불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군사정권은 역사의 보석함을 보듬은 봉우리 태봉산(胎奉山)을 흔적도 없이 허물었다. 역사의 선택은 시대의 마음이다. 방죽 메우는 데 쓰인 태봉산 흙의 심령(心靈)은 ‘그 역사’를 용서했을까? 상징성의 깃발은 혼의 증거다.
경양방죽 수난사가 여태 화평(和平)을 말하지 않는 이유일까. 사학자 정건재 박사는 “광주정신과 남도의 마음에 가해진 그 모독을 광주가 어찌 씻는지, 무등산은 지켜본다.”고 말한다.
태봉산 이름의 주역인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왕자 용성대군의 태 담은 태항아리와 태지석(胎誌石)은 우연히 발견돼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태를 묻은 사실을 새긴 비석도 태봉산에 있었으나 산 파내며 함께 사라졌다고 전한다.
배고팠던 시절 무지(無知)의 막판이었을까. 물도 혼도 다 앗긴 그 비극은 끝났을까?
강상헌/슬기나무 언어원장, 언론인
토막새김
옛 호수로는 자못 광활했던 경양방죽이 숨을 거두고는 이내 경주 동쪽 들판에서 수면 50만 평의 인공호수 보문호를 새로 파는 거대한 역사(役事)가 시작됐다. 보문관광단지다. 면적 등의 수치도 대단하지만, 절실히 실감하기 위해서는 가서 몸소 보아야 한다.
세계의 관심 모은 그 국제회의도 자랑스럽게 잘 치렀다. 세계 시민들도 우리와 함께 보았다. 이제 그런 새로운 차원을 빚어야 한다. 마음 열고, 신령스러움 모실 다른 관점에 뜻 합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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