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도 같던 짙은 안개에 갇혀 헤매던 때를 생각한다. 깊은 바다의 암흑 속을 탐색한다고 가정해 볼까. 두 손 휘젓고 본능과 경험 더듬어 한 발짝씩 나아가야 한다. 엎어지거나 허방에 빠질 수도 있으리, 무릎 깨질까 무서워 마냥 한 자리에 서 있으랴?
이낙연 후보와 이재명 후보가 다시 손 맞잡던 그 날, 두 정치가의 뒤편 작은 액자에 적힌 글자는 찾을 심(尋)자였다. 우연일까?
글자 풀어보면, 왼쪽 좌(左)와 오른쪽 우(右)를 합치고 아래에 마디 촌(寸)을 덧댔다. 손 모양 또 우(又)자는 손으로 (자꾸) 뭔가를 한다는 뜻이다. 工(공)자는 만드는 것, 구(口)자는 말하거나 먹는 것이다. 寸은 손목의 한 부분을 그려 손을 상징한다.
‘찾다’는 뜻 드러난다. 암중모색(暗中摸索)이다. 진중한 탐색의 마음을 3500년 전 황하 유역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림으로 그려냈다. 갑골문이다. 그 중에는 동이(東夷)겨레도 있었다.
글자가 이렇게 본디를 가리키니, 이른바 철학이다. 그런데 다만 세상 이치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만 알았더라. 동양의, 한국의 이치는 허랑한 ‘공자님 말씀’이라 웃었다.
노예경제와 식민주의 약탈로 세워온 저들의 문명을 우리는 손가락 빨며 부러워했다. 15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저들 해적선들이 바다로 몰려다니며 여러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저 자본주의는 당연한 듯 인류를 노략질했다. 이제 노예(경제)는 없다. 제국주의 식민지도 어림없다.
미국의 애완견을 자처(自處)한 일본도 그랬다. 구미(歐美)처럼 기생충이었으나 되레 지들이 주인인 양 뻔뻔스레 굴었다. 그들의 요즘 어려움은 실은 지들이 자청(自請)한 것일 터. 돈 없으니 핵 쓰레기 처리도 못 해 인류의 모성(母性) 태평양 바다를 더럽히겠단다. 인간의 짓인가.
중동 원유에 빨대 꽂던 서구(西歐)는 이슬람 겨레들을 이간질하고 제 잇속 채우기 여념 없다. 아무도 그들에게 ‘세상의 경찰’ 역할 부탁한 적 없다. ‘무책임’의 극치, 범죄적 행태다.
망가져 신음하는 지구에는 ‘트럼프주의’에 대한 응징인 듯, 물기둥 불기둥 내리꽂힌다. 기후위기다. 극지방 얼음이 녹는다. 소녀 툰베리의 애원성도 장삿속 때문에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75년 전 프랑스의 알베르 까뮈가 소설 ‘페스트’에서 예언한 팬데믹의 참사,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 시스템은 그 ‘잘 난 몇 사람’을 위해 눈을 감아버린다. 저따위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 진즉 용도폐기 됐어야 했다. 이런 요소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
기득(旣得), 기왕에 얻은 몇 조각 지식과 아파트, 학연 지연 권력, 달러와 ‘영주권’… 그들은 포기할 수 없겠지. 창창한 젊음들이 저 세력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일할 기회도 못 얻는 세상이 옳으냐? 어제 이제(오늘)의 흙수저는 하제(내일)도 당연히 흙수저인가.
낙엽 같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김광균 詩 ‘추일서정’)의 허무한 이미지는 정녕 스카이 입성만을 위한 공부인가. 세상을 안 볼 테면, 공부는 왜 하는가.
스마트폰만 보지 말고, 대지의 호한(豪悍)함과 맞짱 뜨라. 미국과 다르니 비로소 ‘우리 BTS’ 아니냐? 왜 스티브 잡스의 자본주의 유리창만 만지작거리는가. 우리 마음의 창(窓)을 열어라.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 하늘인 너의 귀 열어 지구와 우주의 굉음(轟音)을 들으라.
당당하려거든, 베끼지 말고 네 마음을 펼쳐라, 청춘들아. 시스템에게, 어른들에게, 미국에게 애원해도 얻을 건 없다. 요구하라. 거절하면 타파하라. 빼앗으라. 원래 너희 몫이다.
두 거물이 보여준 尋, 이렇게 읽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래서 젊은이들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야 정치도 어렵게나마 길을 찾으리라. ‘심도’(尋道)라고 말을 지어보자. 같은 발음 深到나 心到도 마음 다스리는 이치의 언어이니, 이번의 만남은 尋과 함께 의미가 크다 하겠다.
강상헌 / 미래서원 원장·언론인
토막새김
한자(문자)는 그림이다. 손 수(手)와 뜻 비슷한 또 우(又)나 마디 촌(寸)의 옛 글자도 손 그림이다. 살펴보니, 寸은 又에 점을 찍었다. 친구 우(友)는 손 두 개가 합쳤다. 악수(握手)다. 이 그림이 우정의 뜻으로 번지는(확장되는) 것과 같은 상징체계가 문자학의 주제 중 하나다.
어설퍼 보이는 옛 그림이 지금까지 계통과 격식 갖춘 문자의 세계를 이뤄온 것이다. 대체적인 변전(變轉), 갑골문-금문(金文)-소전(小篆)-해서(楷書)의 흐름만 봐도 (동양적) 논리가 드러난다.
손가락으로라도 한 번씩 써 버릇하면 쉬 원래 그림(실물)을 느끼게 된다. 좋은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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