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을 두고 여수와 통영의 논쟁이 뜨겁다. 국가유산청의 설명문이나 각종 사전류에는 한산도를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적고 있다. 연구자들은 논문이나 저서에 ‘통제영’을 관행으로 써 왔다. 한산도 통제영, 여수 통제영, 고하도 통제영, 고금도 통제영 등이 그것이다.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전해지는 ‘한산도 통제영’ 기록은 있지만, 모두 이순신 사후의 것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박홍미의 〈두룡포기사비〉, 1700년대 후반 나온 〈문헌비고〉 등이 그것이다.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한산도 설’의 뒷배다. 최근엔 여수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은 여수입니다. ‘한산도 설’은 전부 2차, 3차 사료들입니다. 1차 사료를 봐야죠. 1차 사료 어디에도 ‘통제영’ ‘통영’ 용어는 보이지 않습니다. 임금 선조의 교서(敎書)를 봐도, 겸직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는 내용만 있어요.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나 ‘장계’에도 없어요. 이순신 전기물인 이분의 〈행록〉, 이항복의 〈충민사기〉에도 없습니다.”
이순신 리더십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임원빈 대구가톨릭대 석좌교수의 말이다. 지난 8월 29일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사)여수종고회 주관으로 열린 ‘전라좌수영 겸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수군의 활약상 재조명 학술대회’에서다.
임 교수는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주제로 한 발표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독립된 삼군수군통제영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여수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고,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라고 주장했다.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에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여수를 언제나 ‘본영(本營)’이나 ‘영(營)’으로, 한산도는 ‘본진(本陣)’이나 ‘진(陣)’ ‘한산진(閑山陣)’으로 구분해 썼습니다. 명량대첩 이후 찾은 고하도와 고금도도 ‘진’으로 썼습니다.”
임진왜란 때엔 ‘본영’이라 썼고, 본영이 통제영을 가리킨다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여수는 1593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돼 전라·경상·충청 수군을 통제한 곳이고, 이순신이 겸직 교서를 받은 계사년(1593년) 10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 효력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아산현충사, 통영충렬사보다 빠른 사당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온 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이었다. 이순신은 여수에서 전라도 백성들과 함께 왜란을 극복했다. 여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여수였다.
여수에 이순신 관련 유적이 많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 본영인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진해루는 당시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다. 이순신은 진해루를 지휘본부로 썼다. 군사 훈련을 독려하고 군령을 집행한 곳은 고소대다.
고소대에 이순신을 기리는 타루비(墮淚碑)가 있다. 1603년 부하 장졸들이 주머니를 털어 세웠다. 높이 97센티미터, 폭 58.5센티미터로 크지 않지만, 이순신을 기리는 최초의 비석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도 있다. 길이 305센티미터, 폭 124센티미터로 큰 대첩비다. 1620년 조정이 주도해 세웠다. 해남 ‘우수영대첩비(명량대첩비)’와 구별해 ‘좌수영대첩비’로 불린다.
이뿐 아니다. 이순신을 기리는 첫 사당 충민사도 있다. 1601년 어명을 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세웠다. 선조가 편액을 내렸다.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통영 충렬사보다도 62년 앞선다. 앞뜰에 옛 사당의 주춧돌이 놓여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1970년대에 다시 지었다.
충민사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가운데에 두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이 함께 배향돼 있다. 이억기는 이순신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안홍국은 안골포 해전에서 숨졌다.
충민사 유물관도 있다. <난중일기>로 통하는 이순신의 친필 임진일기, 정유일기, 갑오일기 등이 복제본으로 전시돼 있다. 곡나팔과 영패, 귀도, 조선장수의 갑주도 볼 수 있다. 유물관 앞에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화포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화포의 생김새와 기능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절집 석천사도 있다. 1599년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이 지었다. 자운은 승려 300명으로 꾸려진 의승수군 대장이었다. 옥형은 군량미 조달에 앞장섰다. 의승당에 이순신과 자운·옥형, 의승군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유교 사당과 불교 절집 한데 어우러져
유교의 상징인 사우와 불교 절집이 한데 어우러진 사연도 애틋하다. 충민사는 이순신 휘하에서 종군한 향교 교리 박대복의 후손에서 비롯됐다. 이순신이 물 마시러 오가던 석천(石泉)에 작은 사당을 지었다. 지금의 충민사 뒤쪽이다. 옥형은 정사를 짓고, 죽는 날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승려들은 절집에서 이순신 추모재를 지냈다. 자운은 1599년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충민사와 석천사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충민사 뒤쪽 큰 바위 아래 ‘석천’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석천마을은 여수시 덕충동(德忠洞)에 속한다. 덕충동은 마래산 아래 둔덕으로 인해 ‘덕대’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덕대’와 충민사의 ‘충’을 버무려 덕충리가 됐다. 충무공의 ‘충’자를 가져다 붙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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