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겨울방학이 계속되고 있다. 학창시절 방학 때 가장 큰 숙제는 일기였다. 날마다 써야 할 일기를 미루고 미루다 한꺼번에 쓰기 일쑤였다. 개학을 앞두고 한꺼번에 쓰는 일기는 어려웠다. 여러 날 전 날씨는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한달 전 날씨까지 더듬어야 했다.
내용도 몇 줄을 넘기기 버거웠다. 날마다 자고 일어나 먹고, 놀고, 다시 자는 거 외엔 쓸 내용이 없었다. 재밌는 하루였다, 어제보다 더 재밌는 하루였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내 생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선생님의 일기검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기 쓰기는 권장할 일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에도 큰 보탬이 된다.
일기가 사회와 국가의 중요한 기록으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난중일기’다. 우리는 이순신의 일기를 통해 임진왜란의 전황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이 전쟁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누가 도왔는지, 어디에서 어떤 싸움을 했는지 등등.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민과 번뇌, 계획과 실천도 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도 기록을 통해 전해진 역사다. 5·18민중항쟁을 기록한 학생과 시민의 일기도, 취재수첩도 모두 기록을 통해 전해진 사실이다.
현존하는 개인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
옛 시대상을 보여주는 타임캡슐, 옛 선인의 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담양 미암박물관이다.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있는 미암박물관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쓴 일기를 통해 당시 사회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유희춘은 기록의 달인으로, 미암일기는 16세기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1567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까지 10여 년에 걸쳐 썼다. 모두 14권인데, 10권이 전해지고 있다. 한자로 90만 자에 이르는, 현존하는 개인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일기에는 개인의 일상이 기록돼 있다. 유희춘의 일상을 통해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유희춘이 아내(송덕봉)와 주고받은 알콩달콩한 이야기도 들어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사상과 물산, 의술, 교육 등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승정원일기’가 불에 타버렸다. 광해군 때 ‘선조실록’을 펴내면서 이이의 ‘석담일기’ 기대승의 ‘논사록’과 함께 참고자료로 쓰였다. 역사자료 가치도 지닌 일기다. 미암일기는 보물(제260호)로 지정돼 있다.
연못에 비치는 모현관 풍경 환상적
유희춘은 해남에서 태어났다. 하서 김인후와 신재 최산두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유생들 사이에서 ‘척척박사’ ‘글 귀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명종 때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반대파를 숙청한 정미사화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선조 때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미암일기는 이때부터 쓴 것이다.
담양은 유희춘의 처가다. 그의 나이 24살 때, 16살 덕봉과 혼인했다. 부인 송덕봉은 여류시인으로, 당대에 한시 38수를 담은 시문집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재치와 순발력도 뛰어났다.
미암박물관은 ‘미암일기’와 일기에서 뽑아 목판으로 인쇄한 ‘미암집’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미암일기와 미암집, 396개의 미암집 목판을 볼 수 있다. 송덕봉의 재치 넘치는 글도 만날 수 있다.
미암과 허준의 남다른 인연도 알 수 있다. 허준이 유배에서 풀려난 미암을 정성껏 돌봤다. ‘동의보감’으로 알려진 허준을 내의원으로 추천한 사람이 미암이었다.
미암박물관 주변은 미암과 덕봉을 실감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선산유씨 종가가 있고, 미암과 덕봉을 기리는 사당도 있다. 박물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미암일기’를 보관했던 모현관도 여기에 있다.
고목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연계정도 멋스럽다. 연계정은 유희춘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연못에 반영돼 비치는 모현관 풍경도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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