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월환(1909-1942) 광복군지대장은 아버지 종성과 어머니 파평윤씨의 4남 3녀 중 막내로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죽, 본관은 금성. 기절과 용맹이 뛰어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192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에 들어가서 박열 등과 함께 당시 유행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1932년 상해로 망명하여 한국혁명당에 가입하고 안재환, 최경수 등과 함께 철혈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본격화하였다.
그 후 황포군관학교와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1936년)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도중 청도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나월환은 임시정부 지원으로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된 청년전지공작대는 징모처 5분처가 되었다. 제5분처는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전개해 온 활동을 그대로 계승해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했다.
제5지대는 이를 기반으로 초기 편성된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기 이전 광복군의 병력 숫자는 고작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전지공작대 200명이 합세하면서 군대 편제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다.
나월환은 대장이 되어 김동수, 박기성, 이하유, 한유한 등 간부와 200여 대원을 거느리고 섬서성 서안을 근거지로 동관을 거쳐 낙양, 운성, 태원, 북평 등지를 연결한 일선 공작에 주력하였다. 섬서·하남·화북 3개 성에서 후방침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천성 중경으로 옮기자 역시 후방공작을 담당하며 서안에서 중국군 육군상장 호종남이 지휘하는 염석산 장군 막하의 제2전구 및 전작의 상장의 제12전구 등지에서 항일전에 참가하였다. 후방에 침투, 유격전과 선무공작으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동포를 구출하는데 큰 성과를 세웠다.
1941년 1월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나월환은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하남·하북성 등지에서 광복군 모집과 홍보 및 첩보 활동을 하는 한편 중국측 사령부의 협조를 얻어 서안에 있는 중국전시간부 훈련단 제4단 내에 특설한 한국청년간부 훈련반에 김천성, 김세용 등 50여 명을 입교시켜 광복군 간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월환은 1942년 3월 1일 중국 서안에서 박동운 등 변절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중국전시 4단은 이 사건에 가담한 박동운 사형, 이하유·김동수에게는 무기도형을 내렸다.
오척단구에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나월환은 중국군관학교를 특출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장개석 총통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임정 광복군 장군 중 이청천, 이범석, 김약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조국 광복 후 김구선생 일행이 귀국할 때 유해를 봉안하여 태고사에 빈장한 후 고향 가야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1986년 9월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백룡산 아래로 이장하고 동년 11월 11일 비를 세웠다.
1963년 건국공로 국민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잠들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58564)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 1 전남새뜸편집실 TEL : 061-286-2072 FAX :061-286-4722 copyright(c) jeollanamdo,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