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모(1909~ 1975)는 나주군 남평면 동사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인 1927년 4월 식민지 노예 교육을 강요하던 일본인 교사 에다(江田)를 다른 학교로 전출시키는 데 앞장섰다.
비밀결사 성진회를 이끌던 장재성이 일본 도쿄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중퇴하고 1929년 6월 귀향해 김기권 집에서 회합할 때 전남사범학교 송동식, 광주고등보통학교 김기권·김보섭·김상환·윤창하, 광주농업학교의 김순복·조길룡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 조직적인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윤창하 등과 함께 재정부 위원에 선임되어 학생운동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는 7월 전남사범학교 강문범·김재용·박노기 등과 함께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장재성을 만나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을 5개 반으로 나누어 사회과학을 연구하였으며, 임종근으로부터 선전 인쇄물을 받아 학생들에 배포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9월 학생운동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사범학교 송동식, 광주고보 김보섭·윤창하, 농업학교 김순복·조길룡 등과 같이 장석천·나승규의 지도를 받으며 북성정에 ‘김기권 문구점’으로 위장한 소비조합을 설립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사건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이른바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이다.
항일학생운동은 1920년부터 지속 발발하고 있었는데, 이 활동이 축적되어 오다가 1929년 11월 크게 폭발한 것이다. 11월 3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날 광주역 앞에서 한일 학생의 큰 충돌이 발생했고, 이를 이유로 일제가 10일간의 휴교령을 내린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미 광주의 학교에서는 독서회가 조직되어 식민지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조선인 본위 교육의 중요성을 각성하는 비밀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성진회’와 ‘소년회’가 대표적이다.
성진회는 조선 독립을 추구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식민지 교육 체제를 반대한다는 목표를 갖고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였다.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조언을 받으며 회원을 확충하고 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성진회가 조직된 후부터 광주학생들의 반일 감정은 더욱 높아지고 표면화되었다.
성진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광주경찰서 형사와 혈연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안 성진회 지도부는 비밀 유지를 위해 1927년 2월 초 자진 해산하고 학교별로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강달모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전남사범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검거돼 1930년 퇴학당했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받았다.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1932년 6월 출옥하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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