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갑(1891∼1960)은 완도군 신지면 신리에서 임영환과 김해 김씨 사이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임재갑은 1905년 완도 사립 육영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육영학교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국권침탈이라는 민족 위기에 대응하여 설립된 학교였다. 한말~일제강점 초 완도의 항일 민족운동가 양성 요람이었다.
선생은 신지도 사설 교육기관인 명신학원을 설립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농촌청년 계몽운동과 항일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4년 신지면 소재지에 명신강습소를 설치한 후 수강생 50여 명에 신교육을 하는 한편 애국행진가 등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를 보급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7일 만에 석방됐다.
1920년대 초 선생은 향후 완도지역 항일운동 주역들의 첫 결집체 ‘수의위친계’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수의위친계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로, 육영학교를 함께 다닌 송내호 선생이 주도하여 조직했다.
같은 시기 소안도의 정남국 선생 등과 함께 간도 용정으로 파견되어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이 무렵 대종교의 세가 강한 간도에서 대종교에 입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은 간도에 있는 용정 대성학원 교원 겸 독립군의 군자금 모금책임자로 활약했다.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 부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도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때 선생의 별명이 ‘백호장군’이었다.
1923년 전후해 고향 신지도로 돌아온 선생은 교육사업에 주력했다. 1924년 3월 설립된 사립 신지학술강습소의 교사로 활동하였고, 신지도의 청년 유지로 학교 설립과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신지청년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청년회 사업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제는 선생과 신지학술강습소에 대한 탄압을 노골적으로 자행했다. 학교가 설립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24년 10월 당국은 신지학교 폐교를 압박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8월 있었던 강연회 활동에서 학생들에게 혁명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선생을 체포했다.
선생은 이듬해 3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해 6월 대구복심법원과 9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출소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27년 2월 전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연합으로 신간회가 조직됐다. 완도에서는 1927년 8월 완도읍내 중학원에서 완도군 신간회지회가 설립됐다. 임재갑 선생은 신간회 완도군지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4년 완도읍내에 유치원 설립 활동을 했으며, 1936년 완도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에 재무부장을 맡아 의연금으로 800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선생은 해방 이후 정치활동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한약방을 하면서 광주와 신지도를 왕래하며 생활하다 1960년 타계했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완도군 신지면 신리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11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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