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상(1893~1921)은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약학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중 3·1만세운동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과정과 독립선언서 내용을 지역민들에 알렸다. 그리고 4월 10일 구림 회사정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읽으며 구림 3·1운동을 이끌었다.
구림만세운동은 영암 만세운동과 다르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암 시위는 보통학교 학생들 주축인 것에 반해 구림은 군서면사무소 직원과 청년들이 조직한 시위였다. 하여, 군서주민 1000여 명을 동원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시위 계획 단계부터 면사무소 직원들의 협조는 큰 힘을 발휘하였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사무소 용품을 활용해 시위용품을 제작하고, 시위에 쓰이는 독립선언서도 면사무소에 있는 인쇄기를 활용해 대량 보급하였다. 최민섭의 인척이었던 당시 면장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척하였다.
구림만세운동이 대규모 시위로 발전한 데는 청년 박규상의 역할이 컸다. 서울에서 3·1만세 운동을 경험한 박규상은 서울 3·1만세운동과 독립선언서 내용을 청년들에 설명하고, 최민섭과 함께 4월 10일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4월 10일 9시 나팔소리와 함께 군서면 주민 1000여 명은 구림보통학교 앞 ‘회사정’으로 모였다. 학교 학생들의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춘 것이다. 9시 조회 시간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주민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맞춰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교실로 밀어 넣으려 했으나, 학생들은 교사의 제지에 불응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박규상은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 광장에 모인 군중에 나눠주고 시위대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는 군중과 함께 영암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위대는 곧 일본 경찰에 의해 진압당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됐다. 박규상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일로 대구형무소에서 태형 등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겨우 보석으로 풀려났다. 석방된 그는 1921년 1월 25일 귀향하던 중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서호강 입구에 배가 도달할 무렵 숨을 거뒀다.
서울대학교 약학과는 전신인 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 박규상을 기리는 의미로 2019년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영암군민은 박규상이 세상을 떠난지 49년 지난 1969년 그의 애국 충절을 추모하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구림마을 회사정 인근에 박규상 애국순절비를 건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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