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봉(1870~1927)은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목포 4․8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이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상업을 위해 목포에 왔다. 목포에 온 유진벨 선교사의 전도로 개신교 신도가 되었다. 1898년 목포양동교회 설립에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이다. 양동교회에서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설립할 때도 금전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포 4․8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서상봉은 개신교 세력의 중심에 섰다. 자신의 집에서 양동교회 신도인 곽우영, 강석봉, 양병진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강석봉은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강석봉과 동명이인이다.
신도뿐 아니라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도 서상봉의 집에서 만세운동 계획을 같이 수립했다. 청년․학생들과 상의하여 4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개신교계에서도 만세운동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정명여학교 교사 강석봉은 학생들과 함께 물감을 칠해 태극기를 준비했다. 이를 서상봉이 받아 만세운동 4일 전부터 목포의 조선인 가정에 태극기를 배분하였다. 4월 7일 서상봉 집에 개신교인들이 모여 마지막 점검을 했다.
4월 8일 일본 경찰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었다. 시위를 예감한 경찰의 선제 조치였다. 일본 경찰은 개신교 세력이 만세운동을 벌이고 있는 양동 부근에 접근하고 있었다. 서상봉은 가장 큰 태극기를 들고 교인을 지휘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서상봉을 붙잡으려 했으나, 교인과 학생들이 보호하였다. 서상봉은 곧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끝까지 태극기를 놓치지 않고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계속 만세를 외치는 서상봉의 두 팔을 잘라버렸다.
서상봉은 두 팔이 잘렸음에도 더 크게 만세를 불렀다. 이 모습을 본 교인과 학생들이 함께 만세를 더 크게 외쳤다. 서상봉을 비롯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잡혀간 목포 시민이 80여 명이나 되었다.
시민들은 경찰서에서도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박상렬의 동생 박상술은 고문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켜 출소 이후 자살하고 말았다. 두 팔이 잘린 서상봉은 5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병세 악화로 석방되었다. 서상봉은 양 팔을 잃은 상처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7년 세상을 떠났다.
서상봉과 함께 잡혀간 40여 명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3년 징역형을 받았다.
목포 만세운동이 대규모 시위로 발전된 것은 일찍이 개항장으로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있었고, 나주평야를 등지고 있는 탓에 쌀을 반출하는 수탈 항구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남지역에서는 개항이 가장 빨랐던 만큼 개신교 선교사들 유입이 가장 먼저 있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학교, 영흥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만들어져 식민지 교육 아닌 자유로운 교실에서 민족의식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점이 컸다. 서상봉을 비롯한 목사 이경필, 장로 양경팔, 서화일, 박여성 등 개신교 신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유였다.
정부는 1986년 서상봉에 대통령 표창을 서훈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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