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1896~1985)은 담양군 담양읍 천변리에서 태어났다. 담양 3·1운동 만세 시위의 기획자이면서 무장투쟁과 언론 활동까지 이어간 실천적 민족운동가였다. 정균호, 정대성, 정균오 등 여러 이름을 쓴 그는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걸어간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던 즈음, 담양에는 서학준이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던 중 검문에 걸려 장성역에서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시위 소식이 3월 초 담양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정기환은 그 시기 광주에 머무는 동안 현지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담양으로 돌아와 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는 지역의 지식인과 실무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상황을 설명하고, 국한종, 정경인, 임민호 등과 함께 담양 시위를 구체화하였다. 이들은 회의를 통해 시위일을 3월 18일로 정하고, 장소는 담양시장으로 결정하였다.
정기환은 태극기 150여 장을 직접 준비하여 시위 당일 새벽, 시장 사거리 다리 밑에 몰래 숨겼다.
하지만 계획은 밀고자에 의해 사전 발각되었고, 조직적인 시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정기환 등은 포기하지 않고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니, 수백 명이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즉각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담양은 3월 20일 각 동리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4월 1일 월산면 야산에서 올라간 봉화를 계기로 여러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담양의 만세 시위는 조직적으로 실행되지 못했지만, 지역에서 지주회 서기, 면작조합 주사, 군청 고용인 등 하급 관리들이 대거 참여한 데다 경고문을 작성해 일반 군중과 학생들을 규합해 운동을 주도하려 한 것은 정기환 등 담양 청년들의 의기가 도화선이 되었다.
정기환은 출옥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박용만이 조직한 의창단에 가입하였다. 의창단은 국내 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였다.
정기환은 무기 운반 임무를 맡아 1922년 권총을 비롯 무기를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 광주에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도 그는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신간회 담양지회 재정부장을 맡았고, 소형 인쇄기와 무기를 비밀리에 확보하여 부호들에게 사형선고문과 군자금 모집문을 발송하였다는 이유로 또다시 담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언론계로 무대를 옮겨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동아일보 담양지국장을 지내며 지역사회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정기환의 삶은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무장투쟁, 사회운동, 언론계몽이라는 네 갈래의 궤적이 하나로 이어지는 실천적인 삶을 견지한 애국지사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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