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렬(1897~ 1981)은 1897년 목포 창평동에서 태어났다.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창평동에서 미곡상을 운영하였다. 그는 미곡상을 하면서 오랜 친구인 남궁혁으로부터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는 목포 청년들을 불러 모아 4․8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남궁혁은 일본에 유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남궁혁은 일본 유학을 하면서 알게 된 2·8독립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박상렬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박상렬은 이에 동조하여 자신의 동생 박상술․박상오까지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양동교회에서 시위를 준비한 개신교 계열 운동 세력과 협력하여 3월 중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3월 10일 광주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면서 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해져 거사를 4월 8일로 미루게 된다.
박상렬은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태극기와 인쇄물을 준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 박성칠이 운영하는 철공회사에서 개인 돈으로 태극기와 인쇄물을 제작해 자신의 미곡상에 인쇄물과 태극기를 쌀가마로 숨겼다. 인쇄물에는 ‘3천만 동포의 봉기에 우리 목포인들도 적극 호응하자!’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4월 7일 쌀가마에 숨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꺼내 이튿날 목포의 조선인 가정에 배부하기 시작하였다. 만세운동 낌새를 안 일본경찰은 아침이 되자 목포 곳곳에 경계를 서고 거리에 헌병이 대기했다.
만세운동을 계획한 박상렬 형제와 개신교 세력은 각기 다른 곳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일본경찰을 혼란스럽게 만들고자 했다. 박상렬은 목포상업학교에서, 박상오는 목포공립보통학교에서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목포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삽시간에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댔다.
일본헌병과 경찰은 목포 곳곳에서 진행된 4·8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했다. 무자비한 일본경찰의 탄압에 조선인들은 총칼을 뺏기만 할 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는 평화 시위를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박상렬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일본 헌병과 경찰에 진압되고, 80여 명이 목포경찰서로 잡혀갔다. 박상렬은 팔, 다리 모두 묶인 채 채찍질을 당했다. 얼마나 고된 고문이었는지, 이때 입은 상처는 평생 장애로 남았다. 동생 박상술은 고문을 받고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박상렬은 이런 시련에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출소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자금을 마련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정부는 박상렬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한편 동생 박상술(1900~1922)은 형 박상렬과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에 박상렬, 박상술, 박상오 삼형제 독립운동을 기리고 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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