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암 오기호(1865∼1916) 선생은 1863년 11월 강진현 대곡면(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 호는 손암이다. 32살이던 1894년 상경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공직에 입문해 주사로 일하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고 나라의 정세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04년 나철·이기 등과 함께 비밀결사 유신회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초 국권 수호를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나인영(나철)·이기 등과 함께 미국에서 열릴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5년 6월 나철·이기·홍필주 등과 함께 국제여론을 파악하고 외교항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방해 책동으로 무산되었다.
선생은 적극적인 방략으로 전환해 1905년 7월 제1차 대일외교항쟁(1905. 7.~1906. 1.)을 실행에 옮기고자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일행은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오쿠마 시게노부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동맹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린의 교류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일왕에게 격문을 보내 평화조약 준수를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또 일본의 한국침략이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무익한 처사이니 이를 지양하고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일행이 일본에서 대일 외교를 전개하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강제체결 소식을 접했다. 이듬해 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제2차 대일외교항쟁을 위해 그해 7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6년 10월 나철·강기환과 함께 도쿄로 가서 제3차 대일외교항쟁(1906년 10~12월)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한국침략 정책을 수립한 일본 정계의 핵심인물을 만나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일본에서 외교 항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여 한국을 반식민지화하려 하자 투쟁방략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동지들과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전개하고자 1906년 12월 귀국하였다. 1907년 2월 나철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위해 비밀결사인 자신회를 조직하고, 동지 20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조직원이 붙잡히고 일제경찰의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사 전말이 드러나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혔다. 오기호는 1907년 7월 유형 5년을 받아 신안 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고종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나철·이기 등과 함께 풀려났다.
1908년 11월 12일 다시 나철·정훈모·이건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제4차 대일외교항쟁(1908. 11.~1909. 1.)을 전개하였다.
1909년 1월 나철·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에 모여 단군교를 세웠다. 이듬해 8월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대종교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주요 독립투사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선생은 대종교를 포교하다 1916년 12월 서울 권농동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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