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영(1890~1973)은 독립운동가이자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1890년 1월 17일 암태도(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134번지)에서 밀양박씨 박찬서와 김포금의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한학자이던 천정진에게 한학을 배웠다. 17세 되던 1907년 암태도에 있던 서당 ‘신석의숙’을 수료했다.
1908년 목포로 이주해 미국인 선교사 맹현리(McCallie Henry)가 지도하는 목포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세례를 받았다. 1916년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시작한 독립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19년 4월 8일 목포 양동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목포에는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돌아온 유학생 남궁혁 등에 의해 일찍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사실이 전해졌다. 서울 만세운동 소식도 곧바로 전해졌다.
서상봉·곽우영·서화일·박여성 등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동참하여 준비하였다. 박상렬·오도근·김영주·권영례·오재복 등 지역 청년들도 만세운동에 참여, 목포공립상업학교와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박복영은 배치문, 서화일, 박종인, 박봉춘, 박계천, 양병진 등과 ‘일심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고, 4·8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 일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경찰 조사 후 4월 17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920년에는 상해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국경선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또다시 1년 6개월 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3년 암태청년회 회장에 취임하고,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소작인회 대표로 선출되어 협상을 담당하였다.
1926년 발생한 자은면 소작쟁의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신문기록에는 박복영을 자은도 소작쟁의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1926년 암태 남녀학원장에 취임하고, 동아일보 목포지국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1920년 암태청년회에서 설치한 여자강습원이 암태사립 3.1학사로 발전하자, 이를 통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지원을 토대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26년 암태남녀학원장을 역임하고, 1928년 자은도 백산리에 백산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무안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73년 11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잠들어 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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