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렬(1899~1933)은 완도군 고금면 청용리에서 경주 이씨 종가의 5남으로 태어났다.
고금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완도읍의 3․15만세운동 소식을 들었다. 이현렬은 재학생 정학균 등과 함께 고금도 만세운동 계획을 마련하고, 고종황제 서거 1주기인 1920년 1월 22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완도읍에서 무산된 시위(2차 시위)를 고금도에선 성공시키려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태극기 만드는 작업도 이현렬이 주도하였다. 창호지와 물감을 한 곳에서 많이 사지 않고, 여러 점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구입하였다. 태극기 만드는 작업도 선생의 집에서 주로 진행했다. 만들어진 태극기는 30장씩 묶어 고금보통학교 기숙사와 주변에 숨겨 놓았다.
3월 21일 밤 선생은 격문 7통을 기숙사에 숨겼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갈 태극기 50장을 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당시 고금도 주재소 순사는 3명, 이들을 따돌릴 작전도 세워야 했다. 작전은 다음과 같다.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 보통학교 뒤편 득암산에 학생 50명이 모인다./ 태극기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신호로 주민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친다./ 순사가 소리쳐도 동요하지 말고, 순사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 외친다./ 마을에 있는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학교 운동장에 모인다./ 이현렬이 주민들 앞에서 격문을 낭독함과 동시에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순사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신속하게 만세운동이 이뤄져야 한다./ 시위가 끝나면 배명순은 태극기를 수거하여 불태워 흔적을 없앤다.’
3월 22일 아침부터 주재소 순사와 소방대원들이 고금보통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하였다. 10시경 학교에서 깃발이 올라가는 순간 덕암산 정상에서 ‘조선독립만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순사들이 ‘내려오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순사들이 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만세소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산 아래 학교 운동장에서 난리가 났다. 고금도의 진짜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이 무려 300여 명에 이르고, 구경나온 인파까지 포함해 1000여 명이 넘었다. 만세운동은 대성공이었다.
고금주재소는 전남경찰의 지원을 받아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무려 80여 명을 연행했다. 선생은 주모자로 재판에 회부돼 3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192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5년제 야간중학을 졸업하고 일본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재학 중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강제로 귀국을 당했다.
1930년엔 고금도 용지포 간척지 투쟁을 주도하여 일본인 지주 스즈키에게 불하된 일부 토지를 회수했다. 이는 ‘용지포 이권옹호동맹 사건’으로도 불리며 전국에 회자됐다.
이듬해 스즈키는 이 사건에 대한 불만으로 용지포 간척지 땅을 다른 농민들에 소작 계약을 시도하였다. 선생은 스즈키 농장에 찾아가 크게 항의하였다. 스즈키 농장의 마름 정문범이 경찰에 신고하였고, 선생은 공갈미수죄로 구속되었다. 용지포 사건에 대한 경찰 측의 보복이었다.
선생은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복역 중 폐렴에 걸려 1933년 출옥하였으나, 7월 초 33살에 작고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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