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수(1926-1976)는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당시 나주 본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광주서공립중학교(광주서중)에 입학하였다. 광주서중은 광주학생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바뀐 교명이다.
그가 입학했을 때 학교에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선배들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민수는 이런 분위기에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민수는 식민 통치에서 행해지는 일제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문제 의식을 가졌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에 비해 큰 차별을 받는 데 분노했다. 그는 차별의 근본 원인은 일제 식민 통치라 생각했고, 한국인이 행복하기 위해선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민수는 독립을 위한 행동 방법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이미 1938년 기환도, 유기춘, 나금주, 유몽룡 등이 ‘무등회’를 만들어 항일활동을 하였으나, 1942년 1월 발각돼 관련자 대부분 투옥되거나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한 때였다.
이민수는 굴하지 않고 동료들을 모아 무등회를 재건하려 하였다. 그는 선배들이 검거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뜻을 같이한 기영도(기태룡), 신균우, 박화진, 최태성 등과 비밀 모임을 갖고 무등회를 재건하였다. 무등회는 선배들의 항일의식을 전파하고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목표로 삼았다.
이민수와 동지들은 학교 내에서의 활동뿐 아니라 연대를 통해 전국 규모의 학생 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대표 학생을 보내 일본의 재일 유학생 선배, 중국의 선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오산, 안주, 전주 등지의 학생 대표들과도 긴밀히 연락하여 일본이 오키나와까지 세력이 밀리면 함께 거사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이민수는 국제 정세로 미뤄볼 때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이민수는 1943년 5월 전국 학생 궐기 호소문 600여 장을 발송하며 거사 준비에 열성을 다 했다. 이민수와 동지들은 학교 당국의 일본어 상용운동에 대항하여 조선어 상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학교 당국으로부터 체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무등회는 1943년 5월 20일을 ‘동맹휴학의 날’로 정하고 학생 참여를 독려하였다. 일제 당국은 학생들 배후에 조직이 있음을 눈치채고, 대규모 수사에 들어가 이민수 등 무등회 관련자를 모두 체포하였다. 이민수를 포함한 무등회원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숨진 학생이 4명이나 나올 정도로 고문은 악랄했다.
이민수는 무등회 주동자로 재판을 받기까지 1년 동안 고통을 당했다. 그는 1944년 9월 재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 형을 확정받고 풀려났다. 학교에선 검거 직후 퇴학을 당하였다.
이민수는 광복 이후 1947년 광주의대 부설 문교부 중등교사 양성과정을 거쳐 중등교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광주의대 부설 문교부 중등교사 양성소는 주로 의대와 관련된 수학, 과학 과목 교사를 양성하였다. 이민수는 1944년 고향 나주에 있는 대정초등학교(나주초교)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9년부터는 중등교사로 근무했다. 광주동중(광주고교), 여수여고, 광주여고 등에서 교육에 힘썼다. 1960년에 교감으로 승진하여 화산중, 나주중 등에서 근무하였다. 교장 승진 이후에는 화순사평중, 옥과중 교장을 지냈다.
이민수는 50대 초반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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