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설(1890~ 1943) 선생은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출신이다. 장성은 전북 고창·정읍·순창과 접해있다. 광주와도 인접하여 교통 연락이 많은 지방이다. 서울에서 3·1운동 시작과 함께 정읍·순창 등지의 천도교인을 통해 소식이 전해졌고, 광주에서는 송흥진이 서신을 보내 운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삼서면 출신 청년 송주일은 3월 10일 마을 예배당에서 신도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삼계면 출신 김응현은 3월 10일 광주읍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정길언·임춘렬·나상철 등과 함께 장성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헌병대의 진압으로 해산됐다.
4월 3일과 4일, 북이면 모현리 주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모현리 만세운동은 짧은 준비 기간에 비해 규모가 매우 컸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4월 3일 저녁 유상설·고용석은 신경식·유상순·고용석·정병모 등 마을 유지들에게 파리강화회의 내용을 알려주며 4월 4일 사거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제의하였다. 참석한 6명 모두 찬성하였다.
이들은 고용석이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돌았다. 많은 이들이 호응하였다. 2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사거리 주재 헌병들에 의해 주동자인 유상설·고용석·유상학·신종식 등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정병모·신태식·신상우·유상순·신국홍·신경식 등이 계획대로 마을 주민 오상구·박광우 등 2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헌병주재소에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장성 헌병대의 무력 사용으로 정병모·신태식·신상우·신국홍·유상순·오상구·박광우 등 8명이 체포되고,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장성 시위를 대표하는 모현리 주민 시위가 짧은 기간에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장성이 한말의병 항쟁의 중심지라는 점에 기인하였다. 모현리 시위에 참여한 지사들 대부분이 30~50대의 중장년층으로 당시 움직임이 구한말 의병 전쟁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모현리 주민의 대부분이던 문화 유씨, 고령 신씨 등이 강한 공동체를 유지한 영향도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학생들이 시위에 영향을 끼쳤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모현리에는 당시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13인의 후손들이 그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989년 세운 사우 삼일사(三一祠)가 있다.
유상설은 심문 과정에서 “본인은 조선민족 중의 한 농민으로 시골에 묻혀 있어 세상일을 잘 모른다. 그러나 타고난 양심은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며 나라에 대한 의리도 대강 짐작한다. 지금 민족이 평화회의를 열고 민족자결을 행하여 조선도 독립할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양심이 발동하여 기쁜 마음에 잠시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사실인즉 자기 나라의 독립을 축원한 것뿐인데 이것이 왜 죄가 되느냐”고 당당한 면모를 보였다.
유상설은 징역 1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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