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역 이인행(1898 ~1975)은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독립선언문 선포식에 참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인행은 곧장 함평으로 내려와 문장 장날에 4·8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함평지역에서는 4월 1일 학다리 역전, 2일 나산면사무소 앞, 3일 손불, 5일 엄다에서 산에 봉화를 피우는 형식의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위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만세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4월 8일, 이듬해 1920년 3월 26일 함평읍 시위에서부터였다.
함평은 영광과 함께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지역이다. 일제는 함평에 헌병주재소를 둬 호남 어느 지역보다 감시를 더욱 철저히 했다.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함평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차근차근 준비가 이뤄졌다. 4월 8일 월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인행이다. 이인행은 문장 사람 이윤상과 월야 사람들을 만나면서 월야 만세운동 계획을 본격화했다.
월야출신 청년 김기택이 앞장서고 동료들과 함께 4월 8일 월야 문장장날 시위를 하기로 모의했다. 그는 한문서당 ‘낙영재’에 모여 1600여 매의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는 등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4월 8일 김기택과 동료 정용섭이 앞장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민중들은 김기택 일행에 모여들어 군중을 이루고, 시위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조됐다. 수백 명의 함성은 월야를 가득 메우고, 행진은 어느새 일본군 헌병분견소까지 다다랐다.
이때 헌병뿐 아니라 주변에서 일하던 일본인 근로자들까지 합세하여 쇠망치로 시위대를 공격했다. 죽창을 갖고 있던 시위대와 마찰을 빚어 인명사고가 나기도 하였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시위 열기를 함평 헌병분견소의 병력만으로 제압하기 쉽지 않았다. 주변 지역 일본군이 지원한 후에야 함평시위는 진압됐다. 4월 10일 만세운동에서 24명이 체포되었다.
이인행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인 기산도, 김종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4·8독립만세운동 이후 이인행은 함평민립학교 설립지부장, 함평신간회 나산분회장, 함평나산학교 설립, 청년운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등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가 1975년 타개했다.
이인행의 애국충절은 임종이 임박하기 전 남긴 시 ‘임종유필’에 잘 나타나 있다. ‘정치가는 정의로운 일로 남과 북의 상잔을 막는 것입니다. 5천만 민족이 서로 투쟁함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마지막 소망의 글입니다. 저를 지켜보았던 지인과 가족과 친구 모두에게 전하는 소망입니다.’
함평 국사재는 이인행을 기리는 사우다. 이인행이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광복 이후 통일을 염원하며 애국애족의 마음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고 살던 집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인행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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