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는 일제의 구조적 수탈에 맞서 각지에서 농민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농민운동은 주로 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전남에서도 사회주의 사상 영향을 받은 농민운동이 활발하였다. 해남과 완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농민운동 활성화를 위해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1933년 두 지역 운동가들이 만든 조직이 전남운동협의회이다.
단체는 농민운동 지도기관으로 전라남도 각 군에 농민조합 조직을 목표로 하였다. 농촌 각 마을에 농민반, 청년반 등 하부조직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면 단위 농민조합지부를 만든 다음, 다시 군 단위 농민조합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방침에 따라 해남, 완도뿐 아니라 인접한 강진, 장흥, 영암 등에 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지역 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는 소작쟁의 등 농민의 삶과 밀접한 관련 있는 사건에 개입하여 이를 지휘하는 활동을 하였다. 많은 농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서회, 저축계, 야학 등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그 결과 전라남도 53개 지역에 농민반이 건설되었으며 28개소에 농민야학과 노동야학 등이 개설되었다. 야학에서는 ‘문맹을 퇴치하고, 러시아와 같이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였다.
고서동은 1933년 장흥에서 고율 소작료를 징수하는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할 농민조합 조직을 꾀하며 완도 정후균과 협의하며 야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회주의와 독립사상을 가르쳤다. 1934년 1월 유재성, 문병곤 등과 각 마을에 2명 내지 5명의 인원으로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을 설치하여 장흥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면과 리 단위에 세포반을 결성하려 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우연한 계기로 발각되었다. 1933년 겨울 강진군 군동면에서 청년들이 망년회를 하던 중 강진경찰서 형사와 싸움이 붙었다. 강진경찰서는 이들을 조사하던 중 청년들 집에서 사회주의 서적을 발견했고, 서적을 지닌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전남 청년들이 광범위하게 결합된 비밀 조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남경찰부 고등과 지휘로 수사망은 강진뿐 아니라 해남, 완도, 장흥, 보성, 순천, 여수 등지로 확대돼 무려 558명을 검거하였다. 전남경찰부는 이들을 8개월 동안 취조한 끝에 1934년 247명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이를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라 한다.
고서동 역시 이때 체포되어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34년 9월 목포지청으로 이송된 후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다. 그는 1928년 와세다대학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전남농촌의 열악한 현실 개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고서동은 출옥 후에도 강원도 홍천광산에서 일하며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송금하는 등 독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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