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성암은 서당에서 신동으로 불리었다. 15살 때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였다. 2년 뒤 더 넓은 세계를 찾아 상경한다. 서울에서 천도교 중앙 간부들과 만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장흥에 천도교가 개설된 것은 1906년 4월이었다. 장흥 천도교는 장흥군 부내면 교촌리에 초가집 교구실을 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성암은 장흥 천도교에서 교훈으로 활동하였다. 교훈은 일반 신도 중 활동력이 강하고 신앙심 깊은 인사로 이루어진 직위였다.
1909년 2월 천도교 중앙총부는 서울에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일반 교도 중에서 청년 213명을 선발, 체계적인 천도교 학습을 받도록 하였다. 장흥 교구에서는 김재계, 박종우, 최홍률 3인이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성암은 천도교 활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성암은 1911년 23살 때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흥교구의 금융원·강도원·공선원 등을 두루 거쳐, 25살에 장흥교구장을 맡았다. 1916년 천도교 중앙총부 조직개편에서 강도원으로 임명된 성암은 5년 연속 교구장과 강도원으로 임명되는 등 장흥교구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한다.
1921년엔 장흥, 완도 고흥 3개군 대표 의정원장(3개군 대교구장격) 선임됐다. 이듬해엔 중앙교헌 기초 예산을 집행하는 ‘교인대회 대표위원’에다 전남도 대표위원을 지냈다. 종법사 종의원 24명 중 장흥, 완도, 강진 3개군 대표 종법사에 피선돼 활동지역을 전국으로 넓혔다.
성암은 학생을 위한 교육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많은 애국지사는 독립의식을 기르고 학생 교육을 위해 다양한 교육기관을 설립․운영하였다. 장흥에는 1905년 명진학교(장흥초교 전신), 1918년 장평공립학교(장평초교 전신), 1924년 대덕간이학교, 1930년 덕도 간이학교가 설립됐다.
성암은 대덕면(현 회진면) 신상리에 사설 학술강습회 개설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통이 불편한 섬 덕도를 중심으로 청년아동을 교육할 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시작된 사설강습회는 1923년까지 계속되었다. 강습 과목은 수신, 산술, 국어, 한문, 조선어였다. 수강생은 8살부터 20살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일제는 강습소 설치를 불허했다. 주민 134명이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1928년 서당으로 설립 신청해 1930년 ‘양영서당’ 개설을 인가받았다. 1933년 덕도에 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양영서당은 대덕 공립보통학교 부설 덕도학교로 편입했다.(현 명덕초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성암은 김재반·황생주·황업주 등과 만나 3월 15일 장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중앙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각지에 배부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천도교 월보’ 편집위원과 천도교 중앙총본부 금융관장으로 활동하던 성암은 일본의 멸망을 염원하는 ‘멸왜기도’를 하다 1938년 2월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옥고의 후유증을 겪은 김재계는 1940년 6월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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