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내호(1895∼1928) 선생은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에서 송윤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을 서당 침벽재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완도 사립 육영학교를 다녔다. 1911년 육영학교 졸업 후 서울 사립 중앙학교에 진학했다. 전라도 출신 유학생 단체인 재경완산학우회를 결성했다.
1914년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소안도로 귀향하였다. 이후 소안도의 사립 중화학원과 노화도의 사립 영흥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인근 지역 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완도에서 거사 계획을 하고 완도읍 장날인 3월 15일 거사를 했다. 유관순 열사의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보다 보름이나 빨랐다. 비록 일본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해산되었으나,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 11월엔 만주에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단의 전라지단 조직책임자가 되었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1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1922년 가을 출옥했다. 1922년 말에는 전국 규모의 반일 비밀결사단체인 수의위친계 결성을 주도했다. 수의위친계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도 일원을 망라하는 조직이었다. 유능한 인재를 뽑아 독립운동 전초기지인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고, 국내에선 군자금을 모금해 중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며, 중국에선 육혈포를 반입해 국내 배포 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엔 완도 배달청년회에 입회하고 주도했다. 100여 명 회원으로 조직된 배달청년회는 친일 면장이나 일제경찰과 어떤 말도 하지 않는 ‘불언동맹’을 실천했다. 1924년 3월엔 700명이 참가한 노동자․농민단체인 소안노농대성회를 조직했다. 단체는 악질지주 배격, 미신 타파 등을 표방하며 소작지 이동을 조사하고 악질지주에 대한 대항책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또 체포돼 1년 이상 감옥에서 보냈다.
1926년 6월엔 소안도에서 사상단체 ‘살자회’를 조직했다. 동생 송기호와 정남국 등 25명이 창립회원이었다. 이들은 사회과학을 학습하고, 노농․청년․여성․소년 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같은 해 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1월엔 소안도에서 수의위친계의 후신으로 청년비밀결사 ‘일심단’을 조직했다. 일심단은 광동군관학교와 일본에 조직원을 파견해 점조직으로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하였다. 신간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회가 조직되자 같은 해 2월 조선민흥회 교섭위원 자격으로 신간회와의 통합을 이끌었다.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에선 본부 상무간사로,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선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11월엔 배달청년회가 완도청년동맹 소안지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작성한 해체선언서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폐결핵이 악화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2월 20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34살이었다.
신간회에서는 사회단체연합장을 추진했지만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고향인 소안면 비자리 선산에 묻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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