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균(1905~1950)은 1905년 3월 완도군 고금면 조약도 탄도리(현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에서 아버지 정병국과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3일, 광주부 부동정(현 광주시 불로동)에 있던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왕재일․장재성 등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5명과 함께 조선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한 항일학생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달 회비 10전을 거둬 운영비로 쓰고, 매달 첫째․셋째 토요일에 모여 민족의식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했다. 동지를 포섭해 조직 확대에도 힘썼다.
1927년 3월 회원 중 전학 가는 학생이 생겼고, 왕재일․장재성․박인생 등 주동학생이 졸업을 하였다. 기밀 누설 위험에 직면하자 정남균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성진회 해체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 주동학생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정남균은 계속 모교인 광주농업학교 독서회와 연락을 유지했다. 고향의 사립 약산학교(현 약산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약산학교는 고금면 조약도 주민 800여 가구가 곡물을 할당하여 거두고, 김 양식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토대로 1917년 세웠다. 사실상 주민들이 세운 학교였다.
선생은 1928년 3월 등사판 인쇄기를 사용해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 경기도 경성부에서 발행하던 일간신문에 1926년 시리즈로 연재된 ‘현하(現下)의 조선과 총독부 경제책’이라는 제목의 산업제일주의 또는 산미증식계획 등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경제정책을 상세히 논한 신문기사 일부분을 인쇄하고 10여 장을 출판해 배포하려다가 체포됐다.
선생은 1928년 12월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법률 제6호 출판법 위반 혐의로 벌금 20원의 형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1929년 1월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형벌이 확정되었다.
선생은 1929년 9월 동아일보 완도지국 기자로 활동하였고 그해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동지들과 이를 지원했다가 이듬해 고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판에 회부돼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1937년 3월 고금어업조합 감사에 취임했다. 광복 후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약산면 지부장을 역임했다. 1950년 9월 고향에서 타계했다. 197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선생의 유해는 1992년 7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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