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설(1909~1975)은 마을 서당 ‘장안서재’에서 한문을 배웠다. 공립 장성보통학교(현 성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광주고보에 수석 입학했다. 광주고보 4학년 때인 1928년 5학년생이던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항거해 그의 복교를 지지하는 활동을 벌이다 퇴학당했다.
이경채가 ‘조선독립’ 벽보를 붙이고 경찰서 등에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담은 선언서를 발송하다 체포되자, 학교는 이경채의 재판도 열리기 전에 퇴학시켜 버렸다. 학생들은 이경채가 무죄 처분을 받을 경우 복교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6월 26일부터 9월 중순까지 학생들이 맹휴투쟁을 전개한 것이 ‘대맹휴투쟁’이다.
변진설은 학우 대표들과 맹휴 중앙본부를 조직하고 ‘중앙본부 격(檄)’ 등 맹휴 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격문을 제작해 학생과 학부모에게 배포했다. 이 활동으로 1928년 8월 2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동아일보>에 ‘지난 23일 장성경찰서 형사 4명이 광주고보 동맹휴업으로 퇴학 처분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변진설을 검거하였고, 정학 처분을 당한 장성의 김천기와 김인중 등을 소환 조사한 뒤 두 사람은 석방하고 변진설은 구금하였다’고 실렸다. 체포된 그는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1928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도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변진설은 부친 변순기가 광주 3·1운동으로 체포될 당시 11살이었다. 10년 뒤 그는 학생 신분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제에 맞서 ‘맹휴투쟁’을 앞장서 전개했다. 1928년 ‘이경채 사건’으로 광주고보생들은 굳게 단결할 수 있었다. 1년 뒤인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으로 불타올랐다. 학생독립운동이 광주에서 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맹휴투쟁에 의한 학생 역량이 축적됐기 때문이었다. 맹휴 투쟁 중 가장 격렬한 1928년 투쟁을 이끈 핵심 인물이 변진설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이은 것이다.
1928년 11월 풀려난 그는 1929년 1월 백양사로 출가했다. 송만암 대선사로부터 참선 공부했고, 이후 화엄사에서 전진응 스님에게 불교 경전을 수학했다. 1939년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 스님 문하에서 전법계를 받았다. 법명은 ‘월주(月舟)’, 법호는 ‘봉암(鳳庵)’이다.
월주 스님은 경남 함양군 백운산 화과원에 주지로 재임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독립자금을 제공한 곳이다. 백용선 선사가 1927년 설립한 화과원은 당대 선지식인이 선농불교를 실천하면서 독립운동과 불교 개혁, 사원의 자립경제, 빈민 아동 교육복지, 불교 경전 번역과 저술 등을 전개한 공간으로 항일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역사·문화 거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월주 스님은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 이사로 선임됐으며, 해인사 법보학원 강사, 대원사 강원 강사를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해인대학과 마산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1975년 열반에 들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200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김남철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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