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연분홍빛이 매혹적이다. 로제와인을 닮았다. 눈이 먼저 마신다. 잔에 따르자 기포가 반짝거리며 올라온다. 탄산이 들어 있음을 직감한다.
맛은 한층 매력적이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배를 한입 베어 문 듯 상큼하다. 달보드레한 맛과 향이 입안을 휘감는다. 간만에 입이 호강한다.
“와 맛있다. 딱 내 스타일인데.” 대학생인 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나주 배를 발효해 빚은 ‘이제: 배로 만들다’(이제·梨製)이다. 알코올 5%의 과실주다. 남도우리술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관광공모전 기념품 부문 현대백화점 특별상에도 이름을 올렸다.
“차갑게 마시는 것이 가장 맛있습니다. 해산물, 샐러드, 샌드위치, 브런치 등 가벼운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피자, 떡볶이, 치킨과도 많이 마십니다.”
‘이제를 빚는 청년사업가 이송미 대표가 전하는 ‘이제’를 맛있게 마시는 방법이다.
대한민국 관광공모전 특별상
‘이제’는 청년기업 페어리플레이(Pear+Replay)가 빚는다. 국내 유일의 페리(배를 발효해 만든 술)전문양조장이다. 중소벤처기업부 로컬크리에이터 기업이자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 보육기업이다. 나주시 원도심, 남고문과 지척에 있다.
‘이제’는 나주 배 토종 품종인 ‘황금’과 ‘추황’, 그리고 ‘신고’를 혼합해 빚는다. 배즙을 섞거나 향을 첨가하는 것이 아닌, 배즙을 발효시켜 빚은 배술이다. 1990년대 나주봉황농협 배술가공사업소가 생산하던 ‘배로와인’을 재해석해 빚었다.
빚는 방법은 와인과 비슷하다. 먼저 배를 갈아 섬유질을 걸러낸다. 섬유질이 술맛을 텁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섬유질을 걸러낸 배즙에 효모를 넣어 발효(2~3주)한다. 발효가 끝나면 랙킹(술 옮김)을 통해 윗술만 떠내 숙성(1~2주)에 들어간다. 숙성이 끝나면 랙킹 과정을 한 번 더 거쳐 ‘필퍼프레스’ 여과기를 통해 맑은 술을 걸러낸다. 황금, 추황, 신고 등 품종마다 같은 방식으로 술을 걸러낸 다음, 세 가지 술을 혼합해 탄산을 주입해 출고한다. 꼬박 한 달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제’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나주 남고문 부근에 있는 페어리플레이와 복합문화공간 카페 39-17마중(나주향교 옆), 서울 여의도에 있는 현대백화점 ‘더현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
“판매처를 여기저기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나주로 와야 마실 수 있는 술로 이름을 얻고 싶어요. 술을 마시면 잘 수밖에 없잖아요. 다음날 해장도 해야 하고요. 그럼 자연스럽게 지역의 잠 잘곳과 밥집에 발길이 잦아지지 않을까요. 원도심을 중심으로 놀고 즐길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볼 계획입니다.”
페어리플레이가 나주 원도심에 양조장을 차린 이유다.
서울 토박이 두 친구의 나주 행
“인터랙션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만지면 반응하는 콘텐츠를 연구·개발하는 일을 했죠. 코로나19로 미술관과 박물관이 닫히자, 친구와 막걸리 빚는 법을 배우러 다녔어요. ‘은퇴하면 양조장을 차리자’라고요. 나주에 함께 온 친구예요.”
막걸리를 배우면서 우연히 서울시의 ‘넥스트로컬’ 사업을 접했다. 넥스트로컬은 서울 청년이 지역자원을 활용해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9년부터 서울시와 협력 지자체가 함께 추진하는 지역연계형 청년창업 프로젝트다.
지역자원 조사에서부터 창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교육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곧바로 지원했다. 지역으론 나주를 선택했다. 외가가 나주였던 터라 어려서부터 친숙했던 점이 한몫했다.
지역자원 조사를 위해 무작정 나주로 향했다. 먼저 들른 곳이 ‘배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 사라진 명주 ‘배로와인’을 만났다. 배로와인은 1995년 나주 봉황농협배술가공사업소가 나주 배로 만든 와인이었다. 술 감별사들로부터 찬사받으며 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시대를 잘못 만난 술이다.
‘배로와인을 복원해 보자’고 친구와 의기투합했다. 청년 입맛에 맞는 술을 만들면 승산이 충분할 것 같았다. 은퇴 후 계획했던 ‘양조 창업’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 대표의 배술 만들기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앞이 캄캄했죠. 우리나라에는 배술을 만드는 곳이 없어 물어볼 곳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운이 좋았어요. 지역자원 조사와 개발 과정에서 만난 분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거든요.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이제’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소장님, 배로와인 개발에 참여했던 농업진흥청 박사님, 양조장 출신 나주천연색소산업화지원센터 센터장님 등등 도움을 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갖은 시행착오 끝에 개발한 시제품을 넥스트로컬 성과 공유대회에 출품했다. ‘나주의 가치를 높이는 술’이란 평가받으며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나주 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술’이란 찬사도 받았다. 7000만 원의 창업 지원금도 상금으로 받았다. 2021년이었다.
이듬해 서울 성수동에 양조장을 차리고 본격적인 배술 양조에 들어갔다. 젊은이를 타깃으로 했던 터라 수도권 청년 소비층의 반응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나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자 2024년 노동절에 나주행을 감행했다.
“배를 발효하는 효모가 아직 국내에는 없어요. 수입 효모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내년에는 기업부설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착즙을 한 후 남은 배 부산물을 활용할 방안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고요.”
이 대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페어리플레이 ☎061-335-0805
(58564)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오룡길 1 전남새뜸편집실 TEL : 061-286-2072 FAX :061-286-4722 copyright(c) jeollanamdo,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