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자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칠산바다에 모래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광굴비는 존재했을까. 젓새우는 서식했을까.
낙월도에서 송이도로 건너가는 길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다. 역시 섬은 바다에서 보아야 제 모습이 보인다. 상낙월도 이장님이 낙월도 주변 풀등을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하지만 하필 조금이다. 물이 많이 빠지지 않아 살짝 드러낸 모래등만 확인하고 송이도로 향했다. 비록 풀등에 내리지 못했지만, 풀등에서 캔 백합탕을 만났다. 영광군 낙월면 낙월도, 송이도, 각이도 주변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곳을 풀등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풀치라 하고, 학술용어로는 ‘하벌천퇴’라 한다.
풀등은 강이나 하천 혹은 바다에서 물길을 따라 이동한 모래가 쌓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래섬은 바람과 조류의 세기에 따라 높낮이와 길이가 변한다. 태풍이 지난 후에는 새로운 풀등이 형성되기도 한다. 자연의 힘만 아니라 바닷모래를 채취하거나 대형방조제나 다리 등 인공구조물이 만들어져 물길이 바뀌면서 모래나 펄이 사라지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한다.
큰 파도 막아주고 재난 예방 도움
<서해연안 해도>(1993)에는 낙월도 위쪽과 아래쪽에 풀등이 있었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풀등은 줄어들고, 송이도와 각이도 사이에 ‘각이사태’라 불리는 풀등이 두 섬을 이을 만큼 늘었다고 한다. 송이도 한 식당에서 마련해 준 백합탕도 이곳에서 채취한 백합으로 끓인 탕이다. 새만금 이후 부안 변산해수욕장을 비롯 고창과 영광 일대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해도에 나타나지 않는 풀등이 생기거나 변화가 일어나면 배가 운항할 때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오래전 지인의 배를 타고 낙월도에서 송이도로 건너다 풀등에 배가 걸린 적이 있다. 당시 풀등에 걸린 배를 빼내려 몸부림을 치다 몇 시간을 기다려 다시 물이 들어온 후 벗어날 수 있었다.
해도에 나타나지 않으니, 현지 사정에 밝지 않으면 운항이 불안하다. 정기조사와 모니터링을 해서 결과를 널리 알려야 하는 이유다.
풀등은 뱃길의 장애물이지만 해양생물이나 물새에게는 오아시스와 같다. 어느 곳보다 먹을 것이 많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영양염류가 풍부해 새우류나 작은 어류들이 모여들고, 이를 섭취하려는 조기, 병어, 민어는 물론 ‘칠산바다로 돈 실러 가자’며 노동요를 부르는 뱃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영광굴비는 이렇게 탄생했다. 풀등은 연안으로 밀려오는 큰 파도나 태풍의 힘을 약화시켜 재난을 예방하기도 한다.
칠산바다 풀등 모니터링 시급
이제 꽃게잡이와 새우잡이가 끝나면 칠산바다도 휴어기에 접어든다. 하지만 낙월도나 송이도 어민들은 ‘맛쇠’를 챙겨 겨우살이를 준비한다. 맛쇠는 맛조개를 채취하는 어구다. 호미보다 3배쯤 되는 길이에다 철사 끝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모양새다. 날씨가 추워지면 두툼하게 옷을 차려입고 풀등으로 나간다.
주민들이 맛조개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면, 먼저 뒷걸음질을 하면서 지나온 모래밭을 매의 눈으로 살핀다. 반응을 하는 작은 구멍에 맛쇠를 집어넣고 걸어서 뽑아낸다. 맛이 사는 구멍은 크고 작은 두 개의 구멍이 이어져 있다. 그 서식굴로 비스듬하게 넣어보면 뭔가 닿는 손맛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철사 끝에 있는 갈고리에 걸어 뽑아 올린다.
서식굴을 보는 눈, 손에 전해오는 느낌, 뽑아 올릴 때 힘과 방향 등이 잘 맞아야 껍질이 상하지 않는 상품성 좋은 대맛을 채취할 수 있다. 솜씨가 좋은 주민은 100개 이상 200여 개를 뽑기도 한다. 어장 일이 멈춘 겨울에 이만한 효자가 없다. 대신 추위를 견뎌야 한다.
인천 옹진군에 있는 소이작도, 대이작도, 승봉도, 사승봉도 일대의 풀등과 모래해안은 2003년 12월 해양보호구역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대이작도 풀등은 썰물에 동서로 2킬로미터 이상, 남북으로 1킬로미터의 모래사막이 나타난다.
이를 생태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가로림만 풀등은 점박이물범의 쉼터로 모니터링이 진행 중이다.
다른 지역에서 풀등 자원을 관리하는 노력에 비하면 칠산바다 풀등에 대한 관심은 전무하다. 모니터링이 이루어져야 이후 다양한 활용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갯벌은 세계유산 등재 후 주목받고 있지만, 모래갯벌의 진수인 풀등은 여전히 건축용 자재로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김준 /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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