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른바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됐다.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다.
여순사건은 처음에 14연대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렸다. 지금은 여순사건, 여순항쟁 등으로 불리고 있다. 공식 명칭은 국사교과서에 실린 대로 ‘여수·순천 10·19사건’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일부 좌익 군인들이 제주도 4·3 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해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며, 미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지만, 오랜 기간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실려 있다.
여수·순천 10·19사건은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으로 요약된다. 피해자들은 보호를 받아야 할 국가로부터 무참히 유린을 당하고도 마음 놓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부모와 가족 잃은 슬픔을 속으로 달래야 했다.
정확한 피해조사와 함께 진실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뤄져서 피해자들의 70년 넘은 아픔과 고통이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만큼 발전한다’고 했다. 여순사건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도 그날의 역사와 함께하는 의미를 지닌다.
순천에서 만나는 역사관과 항쟁탑
순천시 장천동에 ‘여순10·19항쟁 역사관’이 있다. 여수에도 없고, 국내에 하나뿐인 역사관이다. 여순항쟁 순천유족회가 지난해 10월 문을 열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여순사건의 전개 과정과 피해 상황, 정부의 대응과 왜곡 실태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답사 자료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순천 팔마체육관에는 여순항쟁탑이 있다. 위아래로 갈라진 돌의 모양이 좌우 이념대립과 국토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위로 뻗은 여러 형상의 돌은 희생자의 넋과 통일의지를 나타낸다.
순천역과 장대다리, 순천대학교, 순천경찰서도 사적지다.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열차를 타고 진출한 첫 번째 거점이었다. 나중에 진압군은 협력자를 색출하면서 열차사무소를 감금실로 썼다. 진압군은 민간인을 수박등 공동묘지로 데려가 총살했다. 동천의 장대다리(순천교)는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옛 순천경찰서는 봉기군이 경찰과 우익을, 나중엔 경찰이 좌익과 부역자를 색출해 처형한 곳이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였던 순천대학교 자리는 진압군의 주둔지였다. 많은 시민들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도올 김용옥이 해방과 제주4·3, 여순민중항쟁을 다룬 책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소개한 ‘추석이 없는 마을’도 순천에 있다. 승주에서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신전마을이다.
1949년 추석 이튿날 밤, 마을에 진압군이 들이닥쳤다. 진압군은 당시 빨치산 연락책이었던 14살 소년(문홍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집밖에서 총을 난사했다. 마을에도 불을 질렀다. 그날 이후 추석이 마을의 제삿날로 변했다. ‘추석이 없는 마을’이 됐다.
‘손가락총’에 의한 학살, 그리고 암매장
여수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 시작된 곳이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로 가서 4·3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에 맞서 동족살상 거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14연대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했다. 그때 14연대 주둔지가 여수 신월동, 지금의 한화 여수공장 자리다. 1942년 일본이 해군부대와 군수품공장을 건설한다고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민간인과 학생을 강제 동원해 다진 땅이다.
해방 이후 군부대로 이용되다가, 62년부터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운영됐다. 한화 여수공장은 76년에 들어섰다. 일본과 미군에 이어 한국군이 군부대로 썼고, 지금은 화약공장이 들어서 있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간직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사건의 중심에 놓인 여수는 전역이 비극의 현장이었다. 봉기군을 몰아낸 10월 27일부터 진압군과 경찰이 시민들을 가까운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다. 서국민학교와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교) 그리고 미평동과 국동의 넓은 공터 등이 강제 집결지였다. 이 자리에서 우익과 경찰은 여순사건 동조자들을 색출했다.
이른바 ‘손가락총’으로 지까다비(일본식 운동화)를 신고 있거나,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거나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 등을 골라낸다. 겉모습으로 분류를 한 것이다.
심지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이나 고발에 따라 부역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분류된 사람들은 구덩이로 끌려가서 총에 맞아 죽었다.
중앙동 로터리광장도 역사의 현장이었다. 봉기군들이 여수를 점령했을 때는 인민대회장으로 활용됐다. 과거 친일을 한 천일고무공장 설립자 김영준과 우익인사들이 사형을 당했다. 며칠 뒤 진압군의 세상에선, 그때 인민재판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민간인이 즉결 처형되기도 했다.
종산국민학교도 대표적인 학살지로 꼽힌다. 당시 김종원이 이끄는 5연대가 여수경찰서와 가까운 이곳에 주둔하며 부역자들을 찾아 즉결처분을 자행한 곳이다. 김종원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도로 목을 치는 등 광란에 가까운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아직도 쓰지 못한 위령비의 비문
집단 학살은 만성리 해안가에서도 벌어졌다. 만성리는 종산국민학교에서 부역자로 지목된 수백 명을 끌고 와서 학살하고 암매장한 곳이다.
이 자리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여수시가 세운 위령비인데, 설명문과 추모글을 새기지 못했다. 비신 앞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위쪽에 ‘1948년 10월 19일’, 중간에 ‘……’, 아래쪽에는 비석을 세운 날짜 ‘2009년 10월 19일’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여순사건에 대한 군경과 민간인 희생자, 관련기관·단체의 의견이 엇갈리면서다.
가까운 데에 ‘형제묘’도 있다. 진압군이 민간인 125명을 총살해 불태운 곳이다.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끼리 형제처럼 지내라고 묘를 만들고 ‘형제묘’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 비문도 가족의 행적을 알리고 싶지 않은 유족이 새로 판을 덧대어 가려 놓았다. 여순사건의 아픔과 고통이 73년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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